취사공께서 생존하셨던 시대는 대북파가 득세하여 남인의 중앙관직 진출이 힘들었던 광해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그때의 예안김문은 문과출신이 몇분 계셨으나 대부분 당상의 벼슬은 하지 못하셨습니다. 운영자께서 궁금해하시는 취사공 시절의 예안김문을 살펴보면 숙부인의 숙부 되시는 김늑(金늑)께서는 호가 백암(栢巖)이시며 선조조에서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지내셨으나 광해조초기에 대북파에 의해 파직을 당하셨으며 후에 이조판서가 증직되고 민절(敏節)의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나라에서 불천위(不遷位)로 허락하였습니다. 현재 민절공의 제사는 봉화 상운에 있으며 정자는(구학정) 봉화읍 문단(문절공 묘 건너편)에 있습니다. 부석면 상석리 일대는 예안김문 판서공 사명(士明)파의 집성촌 이었으므로 취사공의 후손과는 그 관계가 더욱 밀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참고로 예안김문의 조선조 문과급제자 34명 중 영주를 중심으로 세거한 영남파는 23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습니다.